본문 바로가기

두 번째

[찬백]무지




홍성.

(팬아트는 클릭하여 크게 봐주세요^*^)


사계절의 모든 글,그림의 저작권은 각 작가에게 있으며 무단 복사,이동을 금지합니다.






여름의 찬백. <무지>






내가 다시 그를 만난 건 지난 여름이었다. 청량한 여름. 그를 그토록 좋아한 그녀와 닮아 있었다. 청량하고 또 청량했던 소녀. 어른이 되어서까지 트라우마로 뇌리에 박혀있던 잔상들이 떠올랐다. 아, 그래서 나는 여름을 그토록 싫어했다. 그와 나는 그저 친구였다. 누가 봐도 이상할 건 전혀 없는 베스트프렌드. 그 속에서 내 속은 문드러져가고 있었지만 아무도 알지 못해도 나는 상관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편이 나았다. 나는 그와 쭉 오래가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운명이란 야속한 존재는 나를 그렇게 두지 않았다. 그때가 언제였더라. 아마 그때도 빌어먹을 여름이었을것이다. 무지 홍성 내가 그 새끼를 만난건 약 15년 전. 코 찔찔 흘리는 초딩 무렵이였다. 난 그때 키도 크고 몸무게도 많이 나가서 아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였는데 그 새끼 혼자 나를 그렇게 안 봤다. 키도 쬐끄만한게 나한테 깔딱대는데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밥을 먹을때 옆에서 짹짹대면서 그러니깐 네가 돼진거야! 멍충아! 이러질 않나. 체육시간에 체육복으로 갈아입는 나한테 달려오다가 철푸덕 넘어져서 내가 일으켜주니까 혼자 씩씩대면서 네가 몬데 날 일으켜줘! 이러질 않나. 얼굴은 시뻘개져가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데 그 뒷모습이 지금 생각해도 코미디다.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 새끼를 개새끼라고 부른다. 얼굴은 그냥 개다. 축 쳐진 눈이 마치 진돗개같다. 성격도 개같다. 웃긴건 지도 자기가 그런거 안다. 걔는 나를 여전히 돼지새끼라고 부른다. 시간이 15년이나 흐르고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키만 컸는데 걔는 발만 커졌다. 어찌된게 그때나 지금이나 나랑 그 새끼는 키 차이가 똑같다. 아, 그럼 그 새끼도 열심히 커왔던거다. 내가 자란만큼 걔도 자랐으니까. 첫 스타트가 내가 너무 우월했던거지. 야 박찬열! 이 새끼는 또 카톡으로 짹짹댄다. 테이블 위에 놓아둔 휴대폰이 징-하고 울려 쳐다보니 개새끼♥라고 저장된 알림이 떴다. 징지징지지이징- 또 성격 급한 거 못 참고 카톡을 마구 보낸다. 이렇게 짹짹댈때는 개새끼보다 병아리새끼인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귀엽다. 사실 나는 가끔 이 상황을 즐긴다. 딱 눈을 감고 10초를 세면, 지잉- 지잉-. 전화가 온다. 하여튼 변백현 성격 급한건 알아줘야 된다. "어, 왜." 나는 태연하게 전화를 받았다. 이렇게 하면 변백현이 약올라하기 때문이다. 어, 왜애애애??????? 휴대폰 속 변백현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난 잠시 귀에서 휴대폰을 뗐다. 앞으로 5분 정도는 지혼자 찡찡 댈거기 때문에 귀에서 전화기를 떼고 잠시 딴 짓을 해도 된다. 나는 점심준비를 하려고 냉장고에서 양파를 꺼내서 휴대폰을 도마위에 잘 밀착시킨 뒤에 탁탁탁탁탁!! 폭풍 양파썰기!!! 를 시전했다. 야! 와!나! 너 지금 뭐하냐? 변백현이 약올라하는 소리가 휴대폰을 타고 울려퍼졌다. 나는 또 태연하게 양파를 썰며 목 사이에 휴대폰을 끼고 양파써는데? 했다. 그러자, "야!!!!!!!!!!!" 와, 나 지금 고막 터질 뻔 했다. 네가 사람이야? 어? 사람이냐고! 이 돼지 새끼야! 내가 씨발 그래 너 새끼를 믿는게 아니였어! 시발 그래! 애기때부터 그렇게 병신이였는데! 변백현은 단어 선택도 귀엽다. 애기란다 애기. 사실 변백현이 저렇게 화내는 이유도 이해가 갔다. 오늘 11시까지 '변백현 주선 소개팅'이 잡혀있었는데 내가 그냥 안 나갔다. 근데 정말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분위기상 어찌어찌하다가 알았다고 했긴 했는데 난 여자를 사귈 마음이 전혀 없다. 변백현은 모르지만 사실 난 게이거든. "내가 오늘 너 때문에 얼마나 쪽팔렸는지 네가 알기나 해!!!" 구구절절 오늘 있었던 일을 또 짹짹댄다. 내가 그래서! 엉? 그래가지구 그랬는데! 듣고있지? 변백현은 참 귀엽다. "얘기 다 끝났냐?" "어 그래. 시발. 넌 듣지도 않았겠지." 변백현은 날 정말 잘 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변백현의 현란한 욕을 듣다가 힐끗 시계를 보니 벌써 10분이 지나있었다. 하지만 휴대폰은 여전히 변백현의 목소리로 왕왕 울리고 있었다. 너 공강이지. 틈을 타 내뱉었다. 오늘은 수요일이니까 지금 시간 때에 변백현의 수업은 없었다. 엉. 임마 네 연애사업 때문에 오늘 수업도 째고 온 거 몰라? 아니 이 새끼는 기억을 못하는거야. 아님 못하는 척 하는 거야. 변백현은 또 귀여운 거짓말을 한다. 아, 그래? 나는 또 속아준다. 그래애애애애애???? 변백현은 또 신이 나서 짹짹댄다. 도무지 끝날 기미가 안보인다. 이건 뭐 뫼비우스의 띠도 아니고. 난 또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는다. 그럼 또 변백현이 지가 알아서 말을 멈춘다. 근데 그게 얼마가 지나야 멈추는지는 나도 모르고 걔도 모른다. 오늘의 런타임은 15분이다. 어휴. "야, 말 끝났으면 빨리 집으로 텨와라." "왜? 네가 드디어 나한테 미안하긴 한가보지?"

너 옛날부터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 한번도 한 적 없잖아. 봐봐. 오늘도 그렇지? 오늘은 분명히 네가 미안해야 할... 

아, 또 시작이다. 

변백현의 수다는 고질병이다. 사내새끼가 어쩜 그렇게 말이 많은지. 나는 또 몇번을 아무말 없이 가만히 있다가 드디어 변백현에게 용건을 말했다. 점심 만들었으니까 그냥 빨리 좀 쳐 와. 개새끼야. 말은 이렇게 험해도 내 딴에는 친절하게 말한거다. 그런데 변백현은 우리가 알고 지낸지 15년이나 되는데도 여직 그걸 모른다. 야, 너 내가 개새끼라고 부르지 말랬지? 변백현이 또 짹짹되는게 왠지 또 변백현의 수다타임이 시작될 분위기였다. 그래서 나는 어- 대충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새끼 또 궁시렁대면서 오겠지. 입술이 댓발 나와서 짜증을 내면서 순순히 집으로 오고 있을 변백현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사실 그동안 나에게 변백현은 가끔 웃긴 모자란 개새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가 개새끼와 1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단 4년을 빼고 지지고 볶으면서도 계속 붙어다니는 이유는 서로에게 서로만한 존재가 없었기 때문에, 서로를 대체할만한 그 무언가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얕은 관계의 사람들에게도 한 커밍아웃을 아직 개새끼한테는 하지 않은 이유는 가끔 모자랄정도로 순진한 변백현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쩌면 이 관계를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루는 미친듯이 성욕이 들끓어서 게이바로 원나잇을 하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변백현이 무슨 나한테 마누라라도 되는 마냥 수시로 휴대폰을 확인하면서 같은 과 애들이랑 조별과제를 하는 중이라는 구라를 친 적도 있다. 그 때의 내 자신이 스스로도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그 싸가지 없는 개새끼를 내가 뭐라고 신경을 쓴 단 말인가. 내 성적취향을 깨달은지 벌써 오년이 되어가지만 내가 여직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조차 잘 모르겠다. 변백현이 그렇게 쫌생이도 아니고. 오늘의 점심은 오이양파볶음밥이였다. 변백현은 오이를 못 먹는다. 그치만 나는 일부러 오이를 넣었다. 다 커서 무슨 편식인지. 나는 변백현의 유딩 같은 입맛이 마음에 안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오이를 잘게 다져서 넣어서 변백현이 모르게 한 다음 먹이곤 했다. 오늘 역시 그렇다. 그런데 변백현은 항상 귀신같이 알아챘다. 오이향에 자신의 코가 특화돼있다나 뭐라나. 그치만 나는 변백현이 내 앞에서 짜증을 내면서 약올라하는게 그렇게 좋았다. 그래서 일부러 더 그랬다. 변백현이 또 한입먹고 날뛰겠지. 개새끼는 너무 순진해서 한번쯤 먹기 전 의심할만도 한데 한번도 그런 적 없이 그냥 먹는다. 가끔은 참 바보같다. 쾅쾅쾅! 야, 박찬열! 문 열어! 변백현이 벌써 도착했다. 멀쩡히 달린 벨 놔두고 저 새낀 맨날 문을 두드린다. 벨은 정이 없다나 뭐라나. 점심을 다 차리고 어제 먹다 그대로 둔 식기들을 씻고 있다 물 묻은 손을 앞치마에 스윽 닦고 현관문으로 향했다. 마치 신혼부부의 장면 같았다. 집안일을 하다가 일이 끝난 남편이 돌아오자 버선발로 나가는 새댁 같다. (남편이 문을 좀 거칠게 두드리긴 하지만) 내 자신이 좀 한심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신혼부부라니. 내가 했지만 좋은 상상이다. 난 종종 변백현과 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즐겼다. 생각이 깊어지면 나는 항상 변백현에게 고백하는 나의 표정을 상상한다. 상상의 결과는 언제나 눈물이었다.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점점 눈빛이 아래를 향하고, 그리고 눈물을 흘리고. 해보지 않은 일을 걱정하는 사람을 가장 혐오했지만 변백현에게는 언제나 예외가 존재했다. 나는 내가 가장 혐오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변백현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냥 가끔 개새끼를 볼 때 쟤는 참 내스타일이야.(물론 성격말고 외모) 이러다 그런 상상을 하게 되는거지. 변백현 같은 성격은 나같은 대인배도 커버하기 힘들다. 나도 걔와 나 사이를 한 단어로 정의하기 힘들다. 그냥, 옆에 있으면 좋고, 없으면 슬프고. 딱 그 정도다. 문을 열자마자 변백현이 양 손에 커다란 비닐봉지를 하나씩 들고 낑낑대며 들어오더니 신발을 벗었다. 저 바보는 짐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으면 되지, 하여튼. 나는 혀를 쯧쯧 차며 비닐봉지를 가지러 다가갔다. 쯧쯧 대는 소리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듣고 있던 백현이 갑자기 가자미눈을 하고는 아직 신발을 벗지 않은 발로 내 가랑이를 찼다. 악! "야, 이 돼지새끼야. 진짜 오늘은 내가 너를 죽이고 말거야! 어?" 

전화로 한 말로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 화가 덜 풀렸었나보다. 변백현은 어릴 때부터 태권도를 해왔기 때문에 한 대 맞으면 마치 벽돌로 맞은 듯이 아팠다. 거실 바닥에 나동그라져있던 내가 야, 한번만 봐주라. 했다. 이럴 때는 비굴해져야 한다. 오늘은 내가 생각해도 심했다. 변백현이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몇 번더 바닥에 엎어져있는 내 다리를 퍽퍽- 걷어차고는 씩씩대며 겉옷을 벗었다. 아씨, 아파죽겠네. "야, 진짜 넌 왜 그러냐. 내가 그렇게 싫어?" 

아니, 한 두번도 아니고. 오늘은 진짜 소개팅 하겠다며! 이제 우리 과에서 내 이미지 완전 엉망진창이야! 너 때매! 이게 몇번째냐? 변백현이 또 수다타임을 시작했다. 잔소리잔소리잔소리. 이제 이 잔소리 듣기 싫어서라도 한번쯤 어거지로 소개팅자리에 나가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변백현이 멍청한게 맞는게, 몇번을 내가 이렇게 말도 없이 빵꾸를 냈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소개팅을 제안한다. 진짜 바보인가 싶다. 이쯤되면 내가 소개팅에 의사가 없다는 걸 알아차려야 하는거 아닌지. 나는 또 멍청하게 변백현의 잔소리를 듣다가, 식탁에 놓아둔 볶음밥이 식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손을 휘휘-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밥부터 먹자." 

저 새끼는 끝까지 미안하다는 소리 안하지. 변백현이 뒤에서 궁시렁대는게 들렸다. 사실 내가 변백현에게 사과에 야박한 이유는 내가 사과할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게이인 나를 알아줘. 이게 내 속마음이려나. 그래, 내가 왜 변백현에게 커밍아웃을 꺼리는지 알 것 같다. 변백현이 알아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왜 내가 소개팅을 이렇게 꺼리는지. 알아주길 바랬던 것이다. 이게 무슨 못된 심보인지. 나도 내 자신이 웃기다. 하지만 게이로써 살면서 행복했던 일보다 불행했던 일이 많았던 나는 고슴도치처럼 내 마음을 가시로 중무장을 한 상태였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백현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또 웃기게도 변백현이 나의 슬픔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 힘든 비밀을 간직한 나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채주고, 힘들었지.하고 말해주길 원하는 것. 그게 나의 진실된 마음이었다. "야, 너 혹시... 유정이 때문에 그래?" 변백현이 젓가락으로 밥그릇을 긁으며 슬쩍슬쩍 내 눈치를 볼때부터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고등학교 때, 내가 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사람. 나의 성정체성을 깨닫기 전에 내가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했던 사람. 변백현은 내가 여태 여자 하나를 못 잊어서 연애를 못하는 놈인줄 안다. 몇 번을 아니라고 말했는지, 기억도 안난다. 미안. 내가 질린다는 표정을 짓자 변백현이 알아서 깨갱 나가떨어졌다.

백현과 같이 식탁에 마주 앉았다. 변백현은 여전히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저 넌씨눈 새끼. 아, 오늘 오이 넣길 잘했다. 저 눈치없는 변백현. 당해보라지. 아까 전에 맞은 가랑이가 아직도 후끈거리긴 했지만, 아직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걸 봐서는 여전히 내가 걔를 못 잊었다고 착각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변백현이 숟가락을 가져가 입을 우물대더니 점점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야... 야!!! 눈치를 보자니 오이는 괘씸하고 그러기엔 방금 자기가 한 말이 미안했는지, 변백현이 어설프게 화를 냈다. 나는 괜히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변백현이 입을 다물고 다시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하하. 사실 변백현은 그녀를 좋아했다. 나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변백현도 많이 슬퍼했다. 그때부터였는지, 나는 그 옆에 있으면 상처를 받기 시작했고, 그렇게 그 옆을 떠났다. 그리고 내가 떠났을 때, 그 자리에 영원히 있을 것 같았던 그 사람도 떠났다. 쏴아아아. 장마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8월 4일이다. 몇 년 만에 온 폭염을 씻어주기라도 하듯, 비도 맹렬한 기세로 퍼부었다. 이제는 밖에 나갈 때 현관 앞에서 우산을 챙겨야 하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기다란 장우산을 한 쪽 손에 들고 77번 버스를 탔다. 학창시절에 수백번도 더 탔던 버스였건만 오랜만에 타니 또 낯설었다. 낯익은 정류장들이 귀에 들어왔다. 앞으로 일곱정거장만 더 가면 됐다. 삐이- 여러번 버스의 문이 열렸다 닫혔다. 출근시간이라 그런지 차가 막혔다. 오늘을 위해 강의를 비워둔 것을 후회했다. 그냥 강의 다 끝나고 갈 걸 그랬나. 시간이 지나면 무심해진다더니 정말 그랬다. 나는 그런 내 자신이 끔찍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게 아니잖아. 죽은 사람이 돌아올 수 없는 것처럼. 내가 향하는 곳은 납골당이었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영혼을 모아두는 곳. 그래서 실체로 볼 수는 없지만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곳. 나는 매년 그 곳에 갈때마다 다른 느낌을 받는다. 처음에는 내 영혼을 팔아 그녀를 살리고 싶었다. 그래서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그 곳에 분명히 계시다면, 제발 저를 죽여주세요. 그 다음에는 숨길 수 없는 죄책감에 내 모든 수분을 바닥에 흘렸고, 영원히 슬퍼할 것 처럼 가증스러운 행동을 일삼았다. 그리고 지금은, 무표정한 얼굴로 버스에서 내렸다. 형식적으로 산 꽃다발은 내 마음을 아는지, 날씨 탓인지 벌써 시들해져 있었다. 휴대폰이 계속 울리는 게 변백현인 것 같았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매년 관례처럼 행해지는 일들이었다. 나는 그에게 나의 행선지가 어디인지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녀와 나 빼고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B-83 그녀의 사진과 꽃이 걸려있는 곳이었다. 그녀의 생전이름은 글자로만 남겨진지 오래였다. 그녀의 실질적 이름은 B-83이었다. 안녕. 잘 있었니? 나는 사진 속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그녀의 눈빛이 나를 원망하는 듯 했다. 그래서, 나는 시선을 외면했다. 그렇게 한참을 앞에서 눈을 감고 서 있었다. 사진 속 눈빛을 보니 돌이키고 싶지 않았던, 그래서 평소, 더 요란하게 살았던 나의 과거가 생생히 돌이켜졌다. 나는 그녀를 죽인 것과 다름없었다. 낯선 이의 발이 찬열 앞에 멈추었다. 찬열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찬열은 곧 낯선이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가 성대를 울려 낮은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네가 죽인거야. 아니야. 찬열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정말 그의 실수였다. 그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녀가 그토록 그를 사랑하고 있었는지 찬열은 알지 못했다. 찬열은 서서히 눈을 떴다. 그의 앞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그의 죄책감이 새로운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여름이야. 비가 와. 그녀의 꾀꼬리 같던 목소리가 사진 속에서 들리는 듯 했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사진 속 그녀는 말을 하고 있었다. 여름이야. 비가 와. 여름이야. 비가 와. 여름이야, 비가 와.





"여름이야, 비가 와." 유정은 여름을 좋아했다. 유정이 좋아하는 세가지를 뽑자면, 첫째는 찬열이요. 둘째는 여름, 셋째는 바다였다. 좋아하는 세가지 다 공통된 속성이 있었다. 파랗다. 찬열은 파란 사람이었다. 냉정하고 또 냉정한 사람. 유정에게 찬열은 그런 사람이었다. 사귄지 3년이 되어가지만 한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제대로 해준 적이 없는 사람.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 곁에 오래도록 있어주는 사람. 외로움을 많이 타는 유정은 그런 찬열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찬열과 유정은 찬열의 고등학교 축제에서 만났다. 옆 학교에 다니던 유정은 축제가 열린다는 말에 친구들과 구경을 갔고 거기서 처음으로 찬열과 대면했다. 그때의 심정을 말해달라 하면 유정은 언제나 '세상이 뒤흔들리는 느낌' 이었다고 말한다. 그만큼 강렬했다는 것이다. 유정은 그런 찬열에게 먼저 다가갔고 또 먼저 고백을 했고 먼저 차이고 또 먼저 다시 고백을 했다. 찬열과 유정의 연애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뭐든지 유정이 먼저였다. 유정은 비가 오는 날을 좋아했다. 그래서 유정이 찬열에게 말했다. 여름이야, 비가 와! 앞에서 방싯 웃는 유정의 얼굴에 한번쯤은 반응도 해줄 법한데 찬열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이제 그만 가자." 유정의 컵에는 남은 음료가 아직 가득한데도 찬열이 자리에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에도 유정은 웃었다. 그저 찬열이 좋았다. 찬열이 시체가 되어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유정에게도 장애물이 있었다. 언제나 찬열 옆에 붙어있는 백현. 그것이 그녀의 유일한 장애물이었다. 찬열의 무반응에도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던 유정도 찬열이 백현과 함께 있을 때에는 그러고 싶지 않아도 가슴에 비수가 꽂혔다. 찬열은 언제나 백현을 바라보고 있었고 언제나 백현 앞에서 웃고 있었다. 유정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정은 찬열과 함께 같은 고등학교에 전학을 갔다. 찬열에게는 집이 이사를 왔다고 둘러댔지만 찬열도 어느정도 거짓말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유정은 언제나 찬열 옆에 있고 싶어했다. 백현보다 우선이고 싶었다. 유정의 사랑은 점점 집착과 다를 바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유정은 알아서는 안되는 것을 알게 되고 만다. 백현과 유정은 같은 반이었다. 그리고 유정은 되도록이면 백현과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그래야 찬열이 더 자신을 봐줄 것 같았다. 오랜 시간 연인관계가 지속되고는 있지만 껍데기뿐이었다. 백현을 비롯한 외부인들은 그들이 정말 잘 사귀고 있는 줄로만 알지만. 유정도 사람인지라 거의 3년 간 지속되는 외사랑에 지쳐가고 있었다. 차렷, 경례. 평소와 다름없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찌는 듯한 더위에 많은 학생들이 아침부터 지쳐있었다. 백현과 유정은 짝꿍이었다. 앉고 싶은대로 앉으라는 담임의 말이 끝나자마자 백현에게 달려간 결과였다. 유정은 결과에 만족했다. 찬열은 자주 백현을 찾아왔고 백현을 볼 때 덤으로 유정도 한번씩 봐주었다. 그럴때마다 유정은 예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예쁜 웃음을 봐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백현은 옆에서 자고 있었다. 아침부터 덥다 덥다 짜증을 내더니 자기 성질에 못 이겨 잠들어 버린 것 같았다. 그런 백현을 싸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유정이 백현의 가방에서 삐죽이 나와있는 공책을 발견했다. 유정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잽싸게 공책을 빼내었다. 그리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교실 밖을 빠져나갔다. 쏴아아아. 비가 내렸다. 찬열은 그저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 저만 무표정이었다. 미안해, 유정아. 이 한마디가 하고 싶었다. 그래서 달려간 그 곳에는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유정의 피 묻은 마지막 뿐이었다. 그 날도 비가 내렸다. 저 멀리서 백현이 달려오고 있었다. 찬열은 그 역시 알지 못했다. 찬열의 잘못은 무지. 찬열은 끝까지 뭐든지 아는 것이 없었다. 찬열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찬열의 앞에는 죄책감이 아닌 백현이 서 있었다. 백현은 급하게 달려왔는지 숨을 헥헥거리며 자신보다 한참 키가 큰 찬열의 머리 위로 우산을 드리우려 팔을 벌 서듯 끝까지 뻗고 있었다. 찬열은 갑자기 나타난 백현에 아무 말 없이 놀란 표정만 지었다. "네가 여기가 어딘지 알고 와." 끝내 찬열의 입술이 열렸다. 찬열은 어울리지 않게 화난 목소리였다. "나, 다 알고 있어." 백현이 비를 맞아 파랗게 된 입술을 하고 말했다. 찬열이 8월 4일마다 어디로 가는지, 하루종일 무엇을 하는지 백현은 알고 있었다. 그저 모르고 있을 거라고, 자신이 몰랐던 것처럼 백현도 몰랐을 것이라고 찬열이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유정이 죽은 거 나도 다 안다고." 물론 그 이유도. 나는 다 알아. 찬열의 얼굴이 눈에 띄게 하얘졌다. 찬열이 잠시 휘청대었다. 백현이 그의 몸을 지탱했다. 끝까지 몰랐으면 했던 사실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도 너만은 몰랐으면 했다. 그런데, 그동안의 노력이 다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백현은 너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달려온 길이었다. 하지만 찬열은 그 역시 또 알지 못했다. 백현의 마음을 찬열은 알지 못했다. 찬열은 도망치고 싶었다. 너도 내 탓이라고 생각하지. ' 아니, 아냐. 사실 다 내 탓이야. 찬열은 병적으로 과거를 잊으려 했다. 사실 유정이 죽은 것은 찬열 때문이 아니었다. 유정의 사인은 투신자살이었지만 사실 그것'만'이 진실은 아니었다. 하지만 찬열은 그것 역시 몰랐다. 그래서 찬열은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려고, 과거가 없던 일이 되게 만드려고 평소에 전보다 많이 웃고, 많은 것들을 하며 요란하게 살았다. 과거가 생각나려 하면 찬열은 애써 머릿 속을 지웠다. 그리고 딱 일년의 하루. 8월 4일에만 과거에 찬열로 돌아왔다. 매년 8월 4일이 되면 찬열은 과거의 찬열로 멈추어있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을 붙잡고 흔드는 백현의 모습이 찬열의 눈에 아득하게만 보였다. 백현의 눈물이 흐드러지는 것이 천천히 보였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백현의 입모양이 뭐라뭐라 말을 하지만 찬열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찬열은 백현이 네 잘못이야. 네가 죽인거야. 라고 말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찬열은 그 자리를 돌아 뛰쳐나갔다. 찬열을 부르는 백현의 목소리도,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도,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사실 찬열은 백현을 많이 사랑하고 있었다. 15년 전 백현과 처음 만났을 때 부터 그랬다. 백현도 그것을 알았다. 백현과 찬열은 과거에 연인이었다. 백현은 지금도 자신이 찬열과 연인이라고 생각했다. 찬열은 애써 과거를 지우고 현실에 충실하며 살아가느라, 백현은 혼자만의 연애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우리가 만난지 1000일이 되는 날이야. 백현은 멀어져가는 찬열의 뒷모습을 보며 자고 있는 찬열의 앞에서 눈물을 떨구며 혼자만의 파티를 벌이던 과거가 생각났다. 찬열은 언제나 그랬다. 의사가 말했다. 해리성 기억상실증입니다. 드라마에서 많이 듣던 병명이었다. 백현은 기가 막혀 웃었다. 찬열이 부러웠다. 자신도 뭐든지 다 잊고 편하게 살고 싶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찬열은 유정의 죽음은 기억했다. 유정의 죽음의 원인이 자신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찬열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백현과 열렬하게 사랑했던 것. 그거 하나였다. 찬열에게 백현은 잊고 싶었던 과거였을까. "안녕, 나는 찬열이 여자친구 김유정이라고 해" 백현은 유정을 처음 만났을 때 그저 허망했다. 찬열과 백현은 다툼 끝에 사이가 끝난 지 단 일주일도 안 된 상태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여태 여러 번 깨졌다가 사귀길 반복했기에, 백현은 이번에도 그저 전과 같은 이별일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찬열 옆에 껌딱지처럼 달라 붙어있는 유정의 행복한 미소에 말을 잃었다. 그저 어,어. 만 반복했다. 너 진짜, 걔 좋아해? 백현이 찬열과 단 둘이 있는 시간을 노려 물었다. 찬열은 그저 얼버무렸다. 백현이 바라던 반응과 다른 반응이었다. 그래서 백현은 찬열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너, 정말 걔 좋아해? 찬열은 그저 말 없이 백현에게 입맞춤을 했다. 한적한 음악실에 단 둘이 붙어 앉아 쪽쪽대는 소리만 들렸다. 백현은 민망한 소리에 얼굴을 붉히며 입을 뗐다. [이게, 니 대답이야?] 백현이 마음 속과 다르게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찬열은 그저 미안해했다. 그저, 너의 반응이 궁금했을 뿐이었어, 그래서 그냥 깨지려고 했는데, 유정이가 생각보다 나를 많이 좋아해서, 그래서, 미안해서. 찬열의 변명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백현은 화가 났다. 그래, 그렇게 너 걔랑 평생 사겨. 백현이 쏘아붙이고 음악실을 뛰쳐나갔다.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찬열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찬열이 저렇게 이기적인 아이인줄 몰랐다. 미안하다는 핑계로 유정과 나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잠시만은 이해해줄걸 그랬다. 미래에 우리가 이렇게까지 될줄 미리 알았다면, 나는 그렇게 음악실을 뛰쳐나가지 않았을 거야. 찬열과 백현은 위태로운 모래성같았다. 백현은 굳이 찬열의 기억을 깨우쳐주려하지 않았다. 백현의 마음속에도 굳은살처럼 박혀있는 '죄책감'이 존재했다. 혼자 세상을 떠나버린 그녀 앞에서 행복해지는 것은 유죄였다. 하지만 백현은 언제나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처음 의사에게 찬열의 병명을 들었을 때부터, 이러다 찬열이 내 곁을 영영 떠나버리면 어떡하지.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쓸데없는 불안감. 백현은 그것이 쓸데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평소에 찬열에게 괜히 유정이 얘기를 꺼내고 일부러 더 소개팅을 시켜주려 했다. 소개팅을 거절할때마다 백현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 아직까지는 괜찮아. 아직까지는 버틸 수 있어. 그러다 최근에 찬열이 덜컥 소개팅을 받아들였고 백현은 애써 놀란 표정을 감추었지만 그 날 후로 단 한숨도 잠을 제대로 못 이루었다. 찬열의 곁에 다른 여자가 있는 것은 유정 때의 충격으로 족했다. 찬열이 다행히 약속장소에 나오지 않았을 때, 백현은 상대방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며 돌아서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백현이 찬열의 집 앞에 도착했다. 집 안에 불은 꺼져있었지만, 집 앞 화분에 열쇠가 던져있는 걸로 봐서는 안에 찬열이 있는 게 확실했다. 백현은 괜히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찬열아! 문 열어! 이렇게 하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찬열은 항상 문을 열어주었으니까. 이번에도 그랬다. "왔냐?" 찬열이 말린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웃었다. 찬열의 머릿속이 또 뒤죽박죽이 된게 분명했다. "괜찮아?" 응. 찬열이 대답했다. "생각해보니까 너한테 말 안 한거 그래, 그거 미안하다. 너도 유정이 좋아했었잖아." 찬열의 입꼬리가 떨렸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이 분명했다. 백현은 찬열의 표정에 집중하느라 찬열의 말에 상처받을 시간도 없었다. 찬열은 백현이 유정을 좋아했던 걸로 기억한 것 같았다. 백현은 웃음이 터졌다. "이게 뭐야?" 유정이 백현의 책상에 공책을 던졌다. 백현이 찌푸둥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책상 위에 올려진 공책을 보고 순간적으로 굳었다. 백현이 매일 쓰던 일기장이었다. 이게 왜 유정의 손에서 나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유정이 이걸 읽었다면. 백현의 학창시절은 이대로 끝이 날지도 몰랐다. "이게 뭐냐니까?" 유정이 백현의 팔을 잡아당겼다. 유정의 힘으로 백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현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유정의 표정을 봐서는 유정이 이 안의 내용을 읽은 것이 확실했다. 백현은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대답을 하라고!" 소란스러움에 주위에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몰려들었다. 백현은 당황스러움에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입을 떼었다가 다시 닫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목적지 없이 달려나갔다. 도망치고 싶었다. 야! 뒤에서 유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귀를 막았다. 이제 어쩌지, 어떡해야 하지. 백현은 잠시 우왕좌왕하다 찬열에게 달려갔다. 헥헥대며 달려간 찬열의 반에는 이미 유정이 옆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백현은 유정과 눈이 마주칠 뻔하자 문 뒤에 숨었다. 유정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슬쩍 몰래 훔쳐보니 찬열은 난처한 표정이었고, 유정은 어제와 똑같은 행복한 표정이었다. 내 일기를 읽었다면,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게 가능할까. 백현은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안 읽었다고 하기엔 아까의 행동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분명히 유정은 일기를 읽었다. 하교를 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백현은 찬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받지를 않았다. 최근 유정이 일로 연락이 많이 뜸해졌긴 하지만 찬열이 자신의 전화를 씹는 의중을 알 길이 없었다. 백현은 다시 전화를 걸며 가방 안에 있던 공책을 꺼냈다. 뭐라고 적었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야 했다. 첫 장을 펼쳤다. 2007년 7월 3일 날씨 더움 오늘은 찬열이와 하루종일 우리 집에 있었다. 찬열이 내 귀에 사랑한다고 몇 번을 속삭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오늘은 찬열이와 유정이가 사귄지 100일 째 되는 날이다. 왜 찬열이가 그렇게까지 유정이와 깨지지 않는지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되지 않는다. 오늘도 마지막에는 찬열이와 싸웠다. 찬열이와는 행복한 일만 가득했는데, 왜 이렇게 되어버린건지. 속상하다. 찬열이 말로는 몇 번을 깨지려 해도 유정이가 집 앞에 서 있다는데, 그 정도면 집착이지. 그게 사랑인가? 찬열이도 점점 못 미덥다. 이걸 유정이가 읽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백현은 멘탈이 붕괴되는 느낌이었다. 왜 이런걸 학교에 들고 왔는지. 아니, 백현은 자신의 가방에 이것이 들어있는 지도 몰랐다. 찬열은 아직도 백현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백현이 울상인 얼굴로 다음 장으로 넘겼다. 2007년 7월 9일 날씨 좋음 유정이는 좋은 아이인 것 같다. 오늘 자리를 정했는데 꼭 내 옆에 앉고 싶댄다.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찬열이랑 유정이 눈치보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같이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그동안 찬열이와 같이 있을 때의 나를 바라보는 유정이의 눈빛이 너무 무서워서 찬열에게 헤어지라고 더 화낸 것도 있었는데, 이런 식이면 차라리 좋은 것 같다. 찬열이와 내가 아무리 붙어 있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띵. 찬열에게 문자가 왔다. 백현이 급하게 비밀번호를 치고 문자를 읽었다. '유정이랑 오늘 깨질거야. 그동안 많이 섭섭했지. 지금 유정이랑 같이 있는데, 다 끝내고 전화할게. 미안.' 아, 안돼. 백현은 불안해하며 전화를 걸었다. 지금 상태에서 깨진다면, 유정이 학교에 어떤 소문을 퍼트릴지 알 수 없었다. 찬열과 자신의 사이가 밝혀진다면, 상상되는 아득한 현실에 백현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찬열은 계속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안되겠어. 백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켓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벌써 3시간 째 연락이 없었다. 찬열과 유정이 어디있는지는 알 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풀고 싶었다. 쏴아아아. 방금 전까지 멀쩡하던 날씨가 우루루쾅쾅 천둥이 치기 시작하더니, 장마라도 시작하는 듯 장대비가 쏟아졌다. 우산이 없는데. 백현은 당황해 건물 안으로 몸을 피했다. 나온지 10분도 안됐는데, 날씨도 백현을 도와주지 않았다. 백현은 비를 피하는 그 사이에도 여러번 찬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손톱을 이로 깨물며 안절부절하던 백현이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빗 속으로 들어갔다. 번화가 어디에라도 있지 않을까. 비가 와서, 돌아갔을까. 백현은 찬열이 계속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이상하게 기분이 안 좋은 아침이 있다. 일어나기가 싫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무언가 불길한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 그런 아침이면 언제나 그 날 하루는 운이 더럽게 안 좋았다. 예지력이라도 있는건지, 그래서 찬열은 그런 날이면 아무 데도 나가려하지 않았다. 굳이 나가지 않아도 불길한 일은 찾아왔다. 예를 들어, 접시를 깬다거나, 갑자기 비가 와 빨래가 다 젖는다거나. 이런 사소한 것들. "이상하게 기분이 더러운 아침이 있지 않냐?" 백현에게 물었다. 모닝커피를 먹던 백현은 아침부터 웬 개소리냐며 핀잔을 했다. 변백현은 언제나 부정적이다. 참, 저런 애를 누가 데려갈지. 걱정이다. "아니, 왜. 그럴 때 있잖아. 이상하게 불안하고, 무슨 일이 생길 것 같고." "왜? 너 지금이 그러냐?" 웬일로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줄 생각인지, 변백현이 몸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나는 그저 웃었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언제나 내 마음을 모른다. 내 자신의 마음인데, 하나로 정의할 수 없었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으니까. 변백현은 또 복창이 터진다는 표정으로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언젠가, 그런 적 있었거든. 이상하게 기분 더러운 아침에, 거울을 보는데. 뭔가 낯설었어." 변백현이 똥 씹은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야, 너 병원 한번 가봐라. 저 새끼가 진짜. "아, 변백현 좀 들어봐라. 뭔가 잊은 듯한 느낌, 그런 게 들더라니까. 나 자신에게 중요한 무언가가 없는 듯한 느낌이었어." 이건 무슨 느낌일까. 변백현이 커피 잔을 탁자 위에 내려 놓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분주히 부엌에 가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쟤는 커피 먹다 말고 갑자기 설거지를 해. "너 뭐 잘못 먹었냐?" "니네 집 왜 이렇게 더럽냐! 치우고 살아라!" 변백현이 또 화를 낸다. 쟤 성격은 진짜 모 아니면 도다. 갑자기 저럴 때마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다. 설거지를 하는 변백현의 등을 보는데 갑자기 달려가 안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워 보이는 등이다. 변백현 성격도 드러운 우리 개새끼. 누구 하나라도 데려가야 할텐데. 매일 내 연애 도와준다고, 막상 내가 개새끼한테 해준 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변백현도 연애를 하는 꼴을 못 봤다. "야, 변백현." "왜." "넌 왜 연애 안하냐." 여전히 등을 보이며 설거지를 하는 변백현에게 물었다. 내가 너무 정곡을 찔렀나. 변백현이 미동도 없이 잠시 가만히 있더니, 물을 끄고 몸을 돌렸다. 자세히 보니 변백현이 울고 있었다. "야, 너 울어?" 백현에게 달려갔다. 뭐 그딴 질문을 하냐며 변백현이 울며 내 가슴을 쳤다. 차인게 분명하다. 우리 개새끼 울린 년이 누군지 한번 찾아가 혼쭐을 내줘야겠다. "나 너무 힘들어." 변백현이 나에게 안겼다. 이건 좀 당황스러운데. 예상치 못했던 그림이다. 그러고 보니 변백현이 우는 것을 보는 건 오랜만이다. 누군지는 몰라도 꽤 많이 사랑했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변백현이 품에 안겨 우는 걸 당황스러워 엉거주춤하게 보는데, 갑자기 4년 전 일이 생각났다. 그때도 변백현은 이렇게 내 품에 안겨 울고 있었다. 4년 전은 변백현과 내가 거의 3년만에 처음으로 대학 캠퍼스에서 재회했을 때였다. 그러고보니 그때도 여름이었다. 맴맴대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캠퍼스를 거닐고 있는데, 저 앞에서 어딘가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시력이 나빠서 누구지, 누구지. 하며 움찔대고 있던 찰나에 갑자기 그 사람이 나에게 뛰어왔다. 그렇다. 그 사람이 변백현이었다. 변백현이 내 품으로 달려와, 찬열아, 찬열아. 하며 5살 먹은 아이처럼 엉엉 울어댔다. [찬열아, 어디 있었어.] 그러고보니 오랜만이라 생각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정말 친하게 지냈었는데, 유정이 일로 내가 떠나 버려서. 거기까지 생각하니 유정의 일이 생각나 머리가 아파왔다. 변백현의 얼굴을 보니 갑자기 더 생생하게 유정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나는 병적으로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찬열아! 찬열아! 뒤에서 창피하지도 않는지 캠퍼스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변백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를 들으니 머리가 더 아파졌다. 그 후에 몇 번을 더 변백현과 마주쳤다. 그럴때마다 유정이 생각나 도망쳤지만, 계속 만나다보니 적응이 됐는지 어느 새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내가 지금 유정의 죽음에 슬픔보다 죄책감만이 남아있는 것 처럼 말이다. 변백현은 그 후에도 한동안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냥, 입술을 달싹대더니, 갑자기 나를 정신병원으로 데려갔다. 그 때, 난 변백현이 진짜 미친 줄 알았다. 너무 화가 나서 이런 식으로 네 마음대로 할 거면 이제 연락하지 말자. 라는 말을 하고는 간단한 검사만 끝내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버렸다. 그리고는 몇 번의 냉전이 계속 되다가, 그래도 초등학교 때 부터 변백현과 함께했던 추억들이 떠올라, 그냥 내가 변백현을 봐주기로 했다. 가끔씩 변백현이 또라이 같을 때가 있기는 하지만, 내가 이해해야지 어쩌겠는가. 그 후로 변백현과 나는 계속 이런 상태다. 서로의 집이 자신의 집처럼 편하고, 없으면 슬프고 있으면 좋은, 그런 대체할 수 없는 사이. "야, 너 혹시 그거 기억나냐?" "뭐." "우리 고딩 때 벚꽃 보러 갔었잖아." "그랬나?" "그랬나아아아? 하여간 감성제로돼지새끼." 찬열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갑자기 왜 추억팔이냐? 어느 새 까마득해진 고등학교 시절의 얘기에 자신이 늙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벌써 20대의 중반이었다. 찬열은 변백현도 자신도 여직 대학교 하나 졸업 못하고 뭐했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단풍구경도 갔었는데." "진짜 그랬나? 뭐야 그게, 연인도 아니고." 그러게. 백현이 웃었다. 겨울에 눈구경도 갔었잖아! 와 뭐, 연인들이 하는 거 다했네. 찬열이 백현의 등을 팡팡 치며 활짝 웃었다. 봄, 가을, 겨울. 왜 이렇게 우린 뭐 한게 많냐. "여름에는 뭐 한거 없었나?" 백현이 이번에는 쓰게 웃었다. 여름은 덥잖아, 뭐하러 밖에 나가. 지금처럼 집에서 뒹굴대야지. "그런가, 아 근데 요즘 나 진짜 늙었나봐. 왜 네가 하는 말이 다 기억이 안 나냐." 박찬열 벌써 치매 걸림? 대박. 백현이 찬열에게 베개를 던지며 비웃었다. 찬열은 능숙하게 베개를 한 손으로 잡고, 나이스 캐치!하며 베개를 머리에 댔다. 찬열에게는 아예 없는 기억이지만, 백현에게는 어제 일인듯 생생했다. 그 때 정말 행복했는데, 파도처럼 밀어닥힌 옛 기억이 백현을 잠식시켰다. 찬열아. 우리 꽃구경갈래? 갓 고등학교를 입학한 시점이었다. 백현과 찬열은 딱히 사귀자는 말 없이 어느 새 보니 사귀게 되어 있었던 거라, 흔한 기념일도 못 챙겼었다. 그래서 백현과 찬열은 기분 내키는 날을 기념일로 정하자고 서로 약속을 한 상태였다. 예를 들어 변백현 늦잠 잔날, 박찬열 가로등에 코 박은 날. 이런 사소하지만 소중한 날들. 그 날은 아마 급식에 스파게티가 나온 날이었을 거다. 때마침 벚꽃도 만개해있었고 백현과 찬열은 즉흥적으로 꽃 구경을 떠났다. 그 때 찬열은 바람에 떨어지는 벚꽃을 맞으며 서 있는 백현을 보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 생각했다. 꽃이 내리는지 눈이 내리는지 모르는 풍경에 꽃 같은 백현이 웃으며 서 있었다. 찬열은 그 자리에서 백현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집으로 뛰었다. [뭐야, 박찬열.]

집으로 도착하자 백현이 수줍게 웃으며 찬열에게 매달렸다. 찬열은 말 없이 백현에게 키스를 했다. 백현의 입 안이 꽃처럼 달콤했다. 벚꽃을 먹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랑해. 변백현.] [...나도.] [세상에서 제일.] [나도.] 백현은 과거와 다른 현실에 참아보려 했지만 눈물이 났다. 어쩔 수 없었다. 과거에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행복한 사람이었으니. 찬열이 옥상에 서 있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유정은 옥상 난간에서 위태롭게 서 있었다. 찬열은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오늘은 유정과의 사이를 정말로 끝내버려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굳게 먹은 것 뿐이었다. 더 이상 백현과 유정 둘 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거였다. 이런 결과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내려와, 유정아.]

이별통보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유정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은 것이 잘 했던 일인지 그 반대인건지 찬열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유정의 마지막이라도 본 것이 잘 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가지 않았다면, 유정의 마지막은 없었을까. 유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말해. 계속 나랑 사귄다고 말해. 찬열은 한숨을 쉬었다. 유정의 이런 행동에 휘둘려 지금 상황까지 온 것이었다. 더 이상 둘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유정아, 이럴수록 더 상처받는 건 너야!]

너 정말 몰라서 그래? 나 사랑하는 사람 따로 있어! 내가 몇 번을 말해? 찬열은 아직도 알지 못한다. 그 때 이렇게 화낸 것이 잘 한 일이었을까. 찬열은 그 때 많이 지쳐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한번만 더 인내심을 갖고 유정을 타일렀다면, 그랬다면. 유정이 난간에서 내려왔다.찬열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지만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찬열이 안도해서는 안됐다. 찬열에게 다가오는 유정의 눈빛은 이미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내 옆에 있지 않을거면 너도 죽어!]

유정은 괴력의 힘으로 찬열을 옥상 밑으로 떠밀었다. 그리고 한 송이의 꽃잎처럼 자신도 같이 떨어졌다.


찬열은 얼굴이 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하반신 밑으로의 감각이 없었다. 유정이 떨어지면서 찬열을 감싸안았다. 그러고는 마지막 힘을 다해 찬열의 몸을 자신의 위로 향하게 했다. 미안, 찬열아. 귓 속으로 유정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것이 환청인지 찬열은 알 길이 없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에 찬열은 백현 생각만 났다. 전화를 해준다고 했는데... 그동안의 백현과의 추억이 파라노마처럼 스쳐지나갔다. 뭐든지 묻히고 먹는 변백현, 뭘하든 잘 삐지는 변백현, 깜짝 이벤트 해주는 걸 좋아하는 변백현. 찬열이 끝까지 백현 생각밖에 안해서, 그 자리에 백현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두고 온 것만 같았다. 내가 없는 백현이는 어떻게 살까. 찬열은 그와중에 그것이 궁금했다. 찬열이 눈을 감는 그 순간에도 운명의 장난인지 아이러니하게 7년 전 그 자리에는 변백현도 박찬열도 함께 있었다. 백현은 유정의 마지막을 기억했다. 비가 우수수 내리는 날, 우산도 없이 비에 홀딱 젖은 채, 찬열과 유정을 찾았던 칠흑같이 어두웠던 날. 그 때 백현은 용케도 찬열과 유정을 찾았었다. 하지만 아직도 백현은 그 때 찬열과 유정을 찾았던 것을 후회한다. 찬열이 계속 전화를 받지 않아서, 목적지 없이 뛰어다니고 있을 때였다. 

삐용삐용. 요란한 앰뷸런스 소리가 들렸다. 근처 어딘가에서 사고가 났나보다, 라고 백현은 생각했다. 백현은 또 이리저리 찬열과 유정이 있을 법한 곳을 찾아다니다 구급차가 서 있는 곳에 우연히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팔과 다리가 기이하게 뒤틀린 채 피를 흘리고 있는 유정의 육체가 실리고 있었다. !!! 백현은 입을 막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사람의 목숨이 이토록 허망한 것이구나, 라고 백현은 생각했다. 너무 놀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계속해서 구급차 쪽으로 다가갔다. 찬열이, 찬열이는. 멍하니 구급차에 실리는 유정을 바라보다, 생각이 그 쪽으로 닿았다. 비 때문에 주위에 몇 없는 사람들 중에 제발 찬열의 얼굴이 있기를 바라며 주위를 급하게 휙휙 둘러보았다. 하지만 절망스럽게도 찬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백현은 발견했다. 구급차에 실리는 침대가 두개라는 것을. 백현은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이 스위치를 끄듯 암전되었다는 것을 느끼며 그 후의 상황은 알 수 없었다. 그 후에 백현은 찬열이 죽은 줄로만 알고 살았다. 3일 만에 깨어난 백현이 일어나자마자 찬열을 찾자 백현의 모친은 그저 울며, 다 잊어버리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래서 백현은 모든 것을 체념했다. 학교도 나가지 않았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그저 숨만 쉬며 살았다. 그러기를 2년, 어느 정도 마음 정리가 되자, 백현은 하루 종일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공부만 했다. 검정고시를 치고, 대입시험을 치고. 그렇게 해서 합격한 대학교였다. 대학교에 합격했을 때도 백현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그 곳에서 백현은 기적처럼 찬열을 만났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찬열을 보았을 때 맨 처음에는 헛것을 본 줄 알았고(그동안 백현은 찬열의 허상에 시달려왔다.) 그 다음에는 그저 닮은 사람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찬열이었다. 찬열은 어이없게도 너무나 멀쩡했다. 하지만 다시 만난 찬열은 연인이었던 백현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백현을 죽마고우쯤으로 생각했다. 백현은 대체 그날 유정과 찬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무나 알고 싶었다. 그러나 찬열은 해리성 기억상실증과 병적으로 유정에 관한 이야기를 거부했다. 찬열의 정신은 갈기갈기 찢겨있었다. '안녕. 나 백현이야. 기억나니?'

그래서 백현은 찬열과 재회한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때 고등학교 동창을 찾아갔다. 자신이 학교에 가지 않은 이후로 아이들은 무언가를 들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때문이었다. 역시나, 아이들은 다 알고 있었다. 아이들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사람이 죽기까지 한 일이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백현은 곧 동창의 입에서 사건의 전말을 듣고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찬열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다 자신의 잘못인것만 같았다. 그래서 백현은 찬열이 아무리 자신의 마음을 기억해주지 않아도 버틸 수 있었다. 자신보다 힘든 것은 찬열이었으니. 찬열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유정이 마지막에 자신을 위로 감싸안아 돌린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그럴거면 처음부터 나를 떠밀지 말지. 못된 생각이 들었지만 곧 찬열은 유정이 끝내 숨을 쉬지 못한다는 소리를 듣고 죄책감에 통곡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찬열은 언제나 무지할 것이다. 백현이 언제까지 그 옆에서 상처받아야 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저 확실한 것은 찬열이 '언제나' 무지할거라는것. 그것이 자신의 의지더라도. 백현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그저 찬열을 떠나는 방법밖에는 없을 것이다. 비극적이지만 그렇다. 찬열은 8월 4일을 제외한 언제까지고 자신이 행복하다 여기며 살 것이다. 이 역시 비극적이지만 그렇다. 찬열의 '무지'는 불치병이다.





'두 번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백]일기장  (0) 2014.09.17
[찬백]Love In The Rain  (1) 2014.09.17
[백도]매미  (0) 2014.09.16
[백도]복숭아, 너  (0) 2014.09.13
[백도] 라스트  (0) 2014.09.13